그람시의 헤게모니와 이권 카르텔
영어학과
김강 교수

1926년 11월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구속되었을 때 검찰관은 “우리는 이 두뇌를 20년 동안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무솔리니의 독재적 요구였고 그람시는 결국 징역 20년 4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무솔리니 정권은 비록 그람시의 육신을 가두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정신마저 붙들어 맬 수는 없었다. 1937년 4월 숨지기까지 10년 동안 그람시는 옥중에서 무려 3천 페이지에 달하는 ‘옥중수고’(Prison Notebook)를 집필했다.

러시아에 있었던 아내 대신 옥바라지를 하던 처형이 보내주는 몇 권의 책과 지극히 제한된 일부 자료 외에는 접할 수 없던 감옥 안에서 그람시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이자 파시즘에 저항하는 기념비적 저작을 남긴 것은 후대 연구자들에게 여전히 ‘경이’로 인정된다.

대부분 완결되지 못한 초고와 메모 등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그의 옥중 서신을 묶은 ‘감옥에서의 편지’와 함께 아직도 정치철학과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20세기의 위대한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세계에 널리 알려진 그람시 사상의 핵심은 ‘헤게모니’(Hegemony) 이론이다. 민중의 자발적 동의와 강제력의 지배가 균형을 이룰 때만이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적 지배력, 즉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람시는 혁명전략으로서의 헤게모니를 의미했지만, 그것이 사상과 시대, 국가권력이나 시민사회를 초월하여 주목받는 이유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리더십’에 대한 그의 통찰력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강제적 지배의 독재에서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민주화로 진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한 시대의 헤게모니를 유지할 만한 ‘도덕적 리더십’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명분을 앞세운 정치적 계산과 권력을 배경으로 한 술수, 편 가르기식 분열과 반목으로 국가발전의 헤게모니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 당장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최근 대통령은 연이어 ‘반카르텔 정부’를 강조한다. 정치 입문 때부터 보여준 집념이다.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대선 출마의 날을 세웠다.

이권 카르텔에 대한 집착이 어릴 적 정의감, 이전 정부에 대한 콤플렉스, 혹은 정당 지지도를 겨냥한 총선용이라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필시 검사 출신 정치인의 레종 데트르, 존재론적 기반일 듯도 하다. 중요 범죄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서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을 터이다. 어떤 면에서는 마약 소탕을 위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환영도 중첩된다.

이제 남은 관건은 이권 카르텔과의 전쟁에서 대통령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권 카르텔 전쟁이 성공할 수 없다는 한겨레신문 성한용 선임기자의 답변을 인용해보자. 대통령은 노동, 연금, 교육개혁을 국정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 세 분야의 이권 카르텔을 검찰 수사를 통해서 각각 제거하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개혁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기자는 단호히 부정한다.

첫째, 표적이 잘못 설정됐다는 점이다. 이권 카르텔은 대통령의 ‘뇌피셜’로 허구의 관념임을 지적한다. 개혁의 대상인 조직이나 사회 전체를 개악의 대상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부패한 부분을 정확히 도려내야 하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기에 이권 카르텔의 낙인을 찍었다고 진짜로 그 카르텔이 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둘째, 정권주도의 하향식 개혁은 부작용이 크다는 점이다. 박정희에서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일방적 개혁은 오히려 국가와 국민을 분열시킨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정치깡패 소탕, 삼청교육대와 사회정화, 범죄와의 전쟁, 역사바로세우기, 제2의 건국, 비정상화의 정상화, 그리고 적폐청산을 통해 올바른 국가건설을 지향했으나 덕분에 권력의 ‘기생수’들만 세상에 득세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권 카르텔과의 ‘반복’된 전쟁이 또다시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개혁은, 성기자의 예리한 비유처럼, 파괴적인 작업이 아니라 창조적인 작업이다.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통령은 전지전능한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갈등의 능수능란한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국가나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는 때론 현실적으로 마키아벨리적 군주가 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람시가 주장대로 지적 그리고 도덕적 리더십의 소양을 지닌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구성원의 자발적 동의와 조직의 강제적 지배가 균형을 이루게 되고 마침내 전체의 헤게모니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의식 없는 지도자라면 지적인 면도 갖추기 어렵겠지만 도덕적 소양을 겸비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자기 입맛에 따라 이리저리 합의의 모양과 색깔을 바꾸는 것은 민주화를 표방한 독재에 다름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이니 국민은 그저 따라야 한다는 물리적 압박은 지난 전체주의 시절에나 가능할 법한 무념의 소치다. 민(民)은 졸(卒)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