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은 공산주의자인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이연수 교수

맞다, 그는 코뮤니스트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조선 노동당에도 가입했다. 그런데 50년 전 무덤으로 갔던 메카시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레드에 대한 광적인 포비아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민주화의 성지라고 부르는 광주에서 왜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기념사업을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 전 우리는 정율성의 생애와 광주에서 그의 기념사업의 역사성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정율성은 1914년 7월 7일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 부친 정해업은 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전라도 관찰부 공방 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진학한 뒤 음악도의 꿈을 키우면서 이름을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따서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다.

1933년에 정율성의 셋째 형 정의은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방문하자, 그는 전주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 활동 당시 김산(미국의 작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유명)과 교류하며 항일운동을 하던 정율성은 1937년 10월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여 중국 공산당의 루쉰 예술학원, 중국 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 등에서 학습을 했다. 정율성은 1939년 1월에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 문예 공작에 참여하였으며,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당시 팔로군에서 널리 애창되었으며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되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정설송(丁雪松·딩쉐쑹)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다. 정율성은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 ‘조선의용군행진곡’, ‘연안송’ 등 공산주의 혁명 색깔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정율성은 1945년 8·15 광복으로 해방을 이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쪽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북조선 로동당 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하였다. 그는 1951년 북경으로 돌아가 1976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팔로군행진곡’은 현재 중국에서 널리 불리워지고 있고, 중국 현대 3대 음악가 중 한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에서 유명한 혁명 음악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우리에게 철저하게 잊혀진 정율성이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이다. 당시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회는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을 초청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중 양국에서 정율성을 기리는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다.

2005년엔 중국 문화부장이 광주 양림동의 정율성 생가를 방문한 데 이어 중국교향악단과 한국 국립합창단 등이 참여하는 국제음악제가 열렸다. 2004년에는 그의 탄생지 광주 남구 주관으로 정율성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2006년에는 생가터에 기념비가 설치됐고, 2009년에는 남구에 정율성로가 개통되었다. 광주MBC가 주관하는 ‘정율성 동요 경연대회’는 2014년부터 개최되어 왔다. 2020년 정율성 생가 기념공원의 설치계획이 발표되었다.

정율성이 공산주의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맞다, 공산주의자’ 이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을 논하기에는 옳지 않다. 일제하 암흑시기에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조선독립’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해 민족주의, 사회주의 모두 힘을 합처 독립운동에 피를 흘렸다. 독립운동이 사상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은 엄중한 사실이다. 때문에 독립투사 정율성을 기리고 추모하는 사업은 이념으로 편 가를 수 없는 ‘민족의 가치’이며, 후세교육을 위해서도 정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