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자유로운 도전의 계절
영어영문학과
김강 교수

초여름 기운이 벌써 도시에 완연하다. 아스팔트에 아직 아지랑이가 번지진 않았지만, 엊그제 여름의 시작을 선포한 입하도 지난 터이니 더위의 기세는 당연한 촉각이다. 몇 년 전 4월 하순에 느닷없이 쏟아진 눈발을 생각하면, 혹 이 눈부신 5월의 문턱 너머로 게으른 한파가 꿈틀대지 않을지 괜한 조바심이다. 계절도 제 자리를 주고 물러나는 게 참 서운한 모양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자의든 타의든 간에 누군가에게 내주고 나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몸은 비록 떠났지만, 마음만은 익숙했던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성댈 것이 분명하다. 특히 남의 능력을 높이 사기보다는 자신의 폼 나는 자리 수호에 열중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애석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티케, 로마 신화에서는 포르투나로 불리는 운명의 여신이 돌리는 수레바퀴처럼, 세상 이치가 한번 올라서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상식상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윗분'의 망극한 사랑을 치성으로 구걸하며 이제는 광이나 반질거리는 의자 보듬기에 여념 없는 허영의 호걸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보니 여간 밉상스러운 꼴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역사를 소재로 한 역사극이자 현대적 정치극이다. 극에서 전제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가지 정치이념이 대립한다. 시저와 브루투스는 각각 절대적 권력과 공동의 선을 최고의 정치적 과제로 삼는다. 자신이 무력으로 정복한 광대한 영토의 주인이자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지닌 시저는 거만하고, 완고하며, 미신적이고, 변덕 심한 악의를 지닌 전형적인 전제군주로 그려진다. 반면에 충실한 로마의 공화주의자 브루투스는 이성에 기초한 냉철한 판단력을 지니어 대의명분의 행동을 소중히 한다.

셰익스피어는 시저를 제거하려는 브루투스의 거사가 정권에 대한 야망이 아니라 공동의 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브루투스의 논리는 정연하다. 시저를 살모사로 비유한다. 지금은 알이라 위험하지 않을 것이나 부화 후 뱀이 되면 독니까지 갖게 돼 제멋대로 사람을 해칠 것이라고 예측한다. 사람은 높이 오르면 자신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 아래를 멸시하고, 하늘의 구름만을 바라보게 되니" 그리되지 않도록 미리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권력의 자리는 올라가기도 어렵지만 내려오기는 더욱 싫은 법이다.

하지만 국세를 녹차처럼 말아먹은 4대강사업이 보여주듯이, 꽐꽐 흐르는 강물도 앞길 막는 보에 막혀 제 자리에 고이게 되면 썩은 내 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권력이나 사람도 그러하다. 권불십년이라, 막힌 데는 십년도 못돼 발병하기 마련이다. 사람도 한자리로 롱런하면 어색한 새 옷을 시도하기보다는 지금 입은 옷에 더 안달이다. 무사안일이 행복의 해법이다.

자신의 출세가 '어벤져스' 같은 제 능력이라 여겨보지만, 사실은 남다른 경쟁자를 독설과 모함의 설도로 뒤에서 덮친 것은 혹 아닐까. 첫 시작의 도전과 패기는 어느새 꼬리 내려 숨어버리고 오만과 안일의 독선이 한량마냥 활보한다. 쇼펜하우어의 명언처럼, 사람은 자신의 시야의 한계를 세상의 한계로 여긴다. 망원경으로 보던 광활한 세상이 어느새 내 눈에 황홀한 만화경으로 전락한 것이다.

아, 그렇다. 이쯤에 이르면 변화를 향해 묵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유적 결단이 필요하다. 오만한 처세는 행복의 수단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다. 집착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야 몸도 혹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 계절이 오는 중이다. 새로운 시작이자 또 다른 도전이다. 도전 속에 행복도 함께 추구하자. 집착하지 않는 마음, 방자하지 않은 자세, 자신의 역할과 소명을 다했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신감, 새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지가 필요한 때다. 늘 그렇듯, 행복은 사실 바로 내 곁에 있다. 양심의 눈을 뒤덮은 탐욕과 교만 때문에 쉽사리 보이지 않을 뿐이다.